이 글은 아마도, 내 블로그를 주변 사람들이 모르기 때문에 쓸 수 있는 기록이다.
동시에 “지난 2년이 더 이상 특별한 사건으로 남지 않았다”는 작은 선언에 가깝다.
올해 6월 이전의 회고가 비어 있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100% 사실도 아니거니와, 100% 사실이라면 너무 부끄럽기 때문에, 소설처럼 읽어주길 바란다.
내가 스스로를 설명할 때 자주 쓰던 단어는 책임감과 감사였다.
그런데 어느 시점부터 그 두 단어가 흐려졌고, 그 과정에서 후회와 반성을 겪었다.
그리고 그걸 다시 찾아내게 된 과정을 담는다.
시작
친구가 어떤 프로젝트를 완수하면 받을 비용이 50만 원이었는데, “그 돈을 그대로 나에게 주겠다”는 제안을 받았다.
조금 알아보니, 내 입장에서는 난도가 과도하게 높지는 않았다. 바로 직전에 했던 학교 수업 과제의 확장 형태였고, 수행 과정 자체가 내게도 학습이 될 주제였다.
“실제로 돈을 받을지”는 확실하지 않았지만, 나는 그냥 밀어붙였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결과물만 넘기는 게 아니라 발표까지 해야 했다.
즉, “무엇을 만들었는지”뿐 아니라 “어떻게 생각했고 어떤 흐름으로 구현했는지”를 설명해야 했다.
- 파이썬 문법
- 사고의 흐름과 문제 분해 방식
- 어떤 기준으로 의사결정을 했는지
이런 내용을 그 친구가 이해할 수 있도록 정리해야 했다.
나는 밤을 새우며 사후처리까지 도왔다.
여기까지는 항상 내가 해오던 대로 했던 도움의 이야기일 수 있다.
관계의 변수와 ‘끊어내기’의 충돌

다만 상대가 이성이었다. 감정이 전혀 없었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상대방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파악하기도 쉬웠고, 지식의 흡수도 빨라 매일이 더 기대됐고, 필요할 땐 냉정하게 생각해줘서 편안했고, 감사 덕에 정말 많은 에너지도 얻고 있었다.
여러모로 감정 표현이 풍부하면서도, 타인을 위해 논리적으로 생각해주는 참 똑똑하면서도 속깊은 친구였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까지 도와주던 중 상대의 사적인 흔적을 보았다.
그 해석이 맞았는지, 그리고 내가 왜 그렇게 마음대로 추측하고 행동하는지에 대한 문제와 별개로, 내 감정이 매우 크게 요동쳤다.
그 흔적은 마치 나에게 과시하는 듯 했고, 나의 상황와 극명히 대비되었으며, 내 도덕적 가치관과도 충돌하면서 관계 전체에 대한 회의감을 키웠다.
그래서 나는 나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관계를 끊으려 했다.
하지만 그 방식은 상대에게 상처가 됐다.
더 현실적인 문제도 있었다.
과제는 이미 내가 대부분 처리했고, 상대는 기술 숙련도가 충분히 높지 않았다. 지금 끊어내면, 상대는 발표를 치르기 어렵고 학습 기회도 제한될 가능성이 컸다.
여기서 내 기준이 작동했다.
- 이 상황에서 도망치면, 상대에게 손해가 집중된다.
- 나 역시 “책임을 회피했다”는 후회를 오래 가져갈 가능성이 크다.
- 더욱이, 상대의 약점을 쥐고 흔드는 꼴을 보이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금전적 보상은 묻어두고, 최소한 마무리까지는 책임지고 돕자고 결론 내렸다.
나 자신에게 납득 가능한 선택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 이후부터 나는 조금씩 더 계산적으로 변했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였고 스스로도 “정리됐다. 없던 일이었다.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방어기제가 강하게 작동하고 있었다.
자기만은 꼭 기억해주겠다던, 소신을 지켜줄 것 같던 친구마저 나의 기록을 빠르게 지워나갔다.
이유를 묻기 위한 연락조차 하기 어려워지고 있었다.
힘들게 연락이 닿기에, 너무 많은 것을 조심해야 했다.
섭섭함을 토로해도, 어쩔 수 없다는 말만 돌아왔다.
모든 것들이 그 친구의 평판을 위한 거짓말로 덮어지고 있었다.
신뢰가 빠르게 무너져갔고,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잊혀지기 싫었는데, 아무것도 남지 않아서, 다 신기루였던 것만 같았다.
매일같이 '니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냐?'만 반복했던 것 같다.
하지만, 내가 이것때문에 큰 상처를 입었다는 사실을 깨닫기는 너무나도 어려웠다.
도서관 근무: 호의가 이득/손해로 환산되던 시기
도서관에서 근무할 때, 내게 호감을 보이는 사람이 있었다.
쭈뼛거리다가도 내가 먼저 말을 걸면 밝게 반응했고, 내가 공부하거나 작업을 마치면 조심스럽게 간식을 챙겨주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그 호의를 감사로 받기보다, 손익 계산의 입력값으로 처리했다.
- 내가 잘하는 것은 논리적·체계적 사고다.
- 감정적으로 움직이면, 결과적으로 내가 불리해진다.
그래서 머릿속 질문이 이렇게 바뀌었다.
- “이 사람이 내게 줄 수 있는 이익은 무엇인가?”
- “지금 이 주변 분위기에서, 내가 피해를 보지 않고 관계를 종료하려면 어떤 수순이 필요한가?”
결국 나는 조용히 근무를 그만두며 관계 가능성 자체를 차단했다.
그때의 나는 “안전한 선택”을 했다고 생각했지만, 동시에 내가 중요하게 여긴다던 감사가 약해지고 있었다.
팀 프로젝트: 소프티어
취업은 해야 했다.
그래서 채용연계 부트캠프 소프티어를 시작했다.
당시의 나는 정신적으로 안정적이라고 보기 어려웠고, 타인의 감정이 내 행동에 영향을 주는 상황을 불편하게 느꼈다.
그래서 초반에는 일부러 건조하고 공격적인 말투로 거리를 두기도 했다.
그런데 팀원들은 달랐다. 팀을 위해 먼저 움직였고, 필요한 것들을 선제적으로 정리했고, 채용과 직접 연결되지 않는 과제에도 밤을 새워 기여했다.
- 그 친구들은 단순히 계산적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 설령 계산적으로 움직이더라도, 거기에는 감사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내 기준이 잠시 돌아왔다. 나는 내 역할을 다시 정의했다.
- “나도 팀의 성과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하자.”
그 이후로 나는 최선을 다해 코딩했고, 집안 일도 병행하며 할 수 있는 범위를 밀어붙였다.
체력의 한계를 여러 번 느끼기도 했다.마지막 날에는 감기 증상까지 겹쳤지만, 발표에서 흔들리면 팀에 부담이 된다고 판단해 끝까지 연습했고, 시연과 질답을 수행해 입상까지 할 수 있었다.
오랜만에 “함께 성과를 만드는 경험”이 즐겁다는 것을 확인했다. 정말 다들 뛰어난 친구들이었기에, 좋은 결과가 있지 않았나 싶다.
(팀원 8명중 무려 3명이 현대/기아에 입사함...!!)
3월: 병의 진행, 면접, 그리고 혼자 있는 시간
그 무렵 네이버·기아를 포함해 여러 시리즈 C/D 스타트업 면접을 봤다.
지금 돌이켜보면 알고리즘 수상 경력과 위에서 해낸 소프티어 입상 덕택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동시에 아버지의 암이 재발했고 진행도 더해졌다.
환경이 악화되자 나는 더 방어적이 됐다. 면접에서조차 태도와 답변이 손익 중심으로 굳어 있었다.
- 성능 테스트는 안했나요?
- “굳이 성능 테스트도 해야 하나요? 실서비스도 아닌데.”
- 기획자와의 협업은 어떻게 해왔고, 어떻게 할것인가요?
- “업무 분담은 R&R에만 충실하겠습니다.”
- 입사한다면 어떤 일을 하고 싶으신가요?
- “돈 관련 일을 하고 싶습니다. 페이가 높으니까요.”
- 마지막으로 할 말은 있나요?
- “딱히 없습니다.”
당연히 다 떨어졌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주변 환경 탓을 먼저 했고, 책임을 회피하고 환경을 바꿀 묘수만 찾으며 시간을 소모했다.
- 나는 더 잘 될 수 있는데, 왜 나한테만 이런 일이 일어나는거지?
- 차라리 대학원을 갔더라면. 병 간호도 안해도 되고, 공부도 마음껏 했을텐데.
방어 논리는 단순했다.
- 나는 능력이 있는데, 알아보지 못하는 쪽이 문제다.
- 나이가 변수다.
이런 사고는 나를 보호했지만, 동시에 내 선택과 태도를 개선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회고
본격적으로 병간호를 시작하면서, 혼자 생각할 시간이 늘어났다.
그 상황에서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선택지는 제한적이었고, 가능한 행동은 공부와 기록이었다. 그렇게 꾸준히 책을 읽고 블로그에 글을 올려왔다.
어느 날, 조용히 운영하던 블로그에, 구독자분들이 감사히 읽었다는 댓글과 함께 구독해주셨다.
구독자님들 감사합니다.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사람과 연결된 느낌이 있었고, 갑작스레 내가 사회 속에서 어떤 태도로 서 있었는지 돌아보게 됐다.
그 결과, 누구보다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를 혐오했던 내가, 나만을 위해 생각하고 행동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 나는 지난 1년동안 모든 것을 제로섬 게임처럼 해석하고 있었다.
- 누군가가 이득을 보면 누군가는 손해를 본다고 전제했고, 그래서 관계와 협업을 위험으로 취급했다.
- 기록을 없애면서 장기적인 관점을 잃어버렸고, 당장의 이익만 쫓고 있었다.
-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내가 손해를 봤다”고 규정했던 경험들 속에도 내가 얻은 학습과 성장이 있었다.
- 문제는 사건 자체보다도, 사건 이후 커진 피해의식과 과도한 자기보호가 나를 고립시켰다는 점이었다.
-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지만, 제로섬 게임보단 포지티브-섬 게임이 훨씬 설계하기 어렵다.
- 남의 것을 뺏는 것보단, 양쪽에게 이익이 되는 문제로 정의하는 것이 훨씬 어렵다.
- 하지만, 포지티브-섬 게임이 세상에 가치를 부여해준다.
- 이러한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에는, 주변의 악재에 압도된 것이다.
- 결국 나는 닥치면 다 하는데, 거부할 수 없는 흐름에 "어째서 이런 일이 나에게" 라는 말만 해봤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 무엇보다, 닥치면 다 할 수 있는 나를 상상하지 못해, 견디지 못할 상황을 생각하느라 걱정이 앞섰고, 감사가 사라지며 이기적인 관점을 갖게 됐다.
- 흔들리지 않는 확신은 나를 믿어야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믿고 있는 사명을 믿어야 나오는 것이다.
- 난 나를 못믿지만, 내 계획력/실행력/내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음을 믿는다.
- 내가 나에 대해서 너무 모르고 있었다.
- 내가 은근히 "티나지 않게, 도움을 주는 걸 즐긴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고,
- 대부분의 관계에서 주는 것이 익숙한 내가 주지 않으면 아무 관계도 유지될 수 없는 건 당연했다.
- 손해보는 것이 아니라, 그냥 내가 조용히 도우면서 일이 잘 됐을 때 뿌듯하면 된거였다.
- 나는 감사가 받고 싶었던 거지, 칭찬이 받고 싶었던 것이 아니다.
- 내가 주목받거나 칭찬받는 순간, 나는 너무 오만해지고 판단을 그르친다.
- 내가 진짜 하고싶었던 것이 뭔지를 잊어버린다.
- 속된 말로, 버릇이 나빠진다.
내가 바라던 건 결핍과 집착으로 유지되는 것들이 아니라, 지속가능한 미래를 볼 수 있는 것들이다.
이해득실만 계산하며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나 자신은 세상에 아무것도 기여하지 못한다.
단지, "내가 손해보지 않는 법"만 배울 뿐이다.
처음부터 내가 하고싶었던 것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알고, 지속 가능한 윈-윈 전략을 설계하고 들어가야 한다.
그렇게 나에게 다음 두 가지 질문을 던졌다.
내가 언제 가장 많이 성장했는가?
- 이야기의 시작 전에 경험한 아그리콜라 프로젝트 - 매우 도전적이었던 과제
- 이벤트 기반 처리 과제 -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영역의 과제
- 소프티어 부트캠프 - 첫 웹 개발 팀 프로젝트
정리하면, “혼자서 책을 읽는 시간”보다 “타인과 함께 정신없이 문제를 해결하며 결과를 만드는 시간”이 성장을 촉진했다.
나는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는가?
- 시간 관리와 기록
- 제로섬을 포지티브-섬으로 바꾸는 설계
이 질문에 답하면서, 나는 내 경험을 더 이상 방어 논리로 덮지 않고, 내 언어로 설명할 수 있게 됐다.
다시 시작: 좋아하는 일, 잘하는 일, 그리고 꾸준함
그래서 나는 새 일을 시작하기 전 확인할 수 있는, 다음과 같은 체크리스트를 만들 수 있었다.
- 지난 일에 얽메여 "각성 상태"가 되지 말 것.
- 기록되고, 감사하며, 감사받을 수 있는, 나 자신에게 당당한 곳에 있을 것.
- 서로에게 이익이 되는 문제를 정의하여, 함께 즐거울 것.
또한, 지금은 내가 좋아했고, 동시에 잘할 수 있다고 판단하는 도전적인 일로 다시 방향을 잡고 있다.
- 시간 관리 & 일정 기록 서비스: 핀잇
- 알고리즘
- ML/RL
- MSA
솔직히 이 규모의 프로젝트를 혼자 진행하는 과정은 부담이 크다.
"아 이렇게까지 힘들게 해야하나? 프론트 하나도 모르겠고 힘들다."
하지만, 감사가 무너지면 꾸준함이 무너진다.
- 현재 하는 일에 감사하지 않으면, 빨리 끝내고 싶은 마음에 조급해진다.
- 현재 하는 일에 감사하지 않으면, 빨리 끝낼 수 있는 대안을 찾게 된다.
대안을 찾기 전에, “지금 이 작업을 할 수 있는 조건이 주어진 것 자체”에 대해 충분히 감사했는지 점검한다.
나는 꾸준함이 결국 결과물을 만든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다.
이 꾸준함을 통해, 힘들고 어려워도 재밌게 헤쳐나갈 수 있는 원동력을 얻는다.
핀잇이라는 사명이 생기고 나니, 내 안의 단단함이 채워진다.
하지만, 이 기억과 깨달음들을 희귀한 사건으로 과대평가할수록 나는 다시 자아가 비대해질 가능성이 높다.
나는 계속 앞으로 나아가야만 한다.
그래서 이 글은 “나의 특별한 이야기”가 아니라, 나 자신에게 노력해줘서 고맙다는 감사 한마디와 회복의 기록으로 남기고 싶다.
'개인적 공간 > 독서와 사색'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빠르게, 재밌게 배우기 (0) | 2025.12.20 |
|---|---|
| 유의미한 대화 (0) | 2025.12.10 |
| "가치 있는 문제" - 리처드 파인만의 편지 (0) | 2025.11.23 |
| 아프니까 청춘이다 (0) | 2025.11.08 |
| 사내 정치는 제로섬이 아니라 윈윈이다. (0) | 2025.10.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