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 공간

[신경끄기의 기술] 당신은 무엇을 견딜 수 있는가?

조금씩 차근차근 2025. 7. 10. 15:02

이 책은 스스로의 인생에 과몰입하지 않고, 단순한 세상의 일부로 살아갈 때의 기쁨을 정의한다.
삶에서 중요하지 않은 일에 집착하지 않고 가치 있는 것에 집중하도록 독려한다.

냉소적이면서도 현실적인 조언을 통해 독자가 불필요한 스트레스를 덜고 자기 자신에게 솔직해지도록 돕는다.

프롤로그

내 경험에 따르면, 소위 '인생의 목적' 때문에 고민하는 사람들은 항상 자기가 뭘 해야 할 지 모르겠다고 불평한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뭘 해야 할지' 모르는 게 아니다. 문제는 그들이 '뭘 포기해야 하는지' 모른다는 거다.

우리는 특별한 일을 해서 부자가 된 사람들을 찬양한다. 하지만 이런 '특별한 일'은 보통 극도로 높은 기회비용을 요구하는 법이다.

모든 걸 가지려는 사람, 즉 인생의 버킷리스트를 모두 채우려 하는 사람은 아무것도 잃지 않는 인생을 살려고 하는 것과 같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신경 끄기의 기술' 이다.

단언컨데 고통을 극복하는 유일한 길은, 고통을 견디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위대함이란 그저 우리 마음이 만들어낸 환상이자, 우리가 스스로에게 강요한 가짜 목적지 혹은 내 머릿속의 아틀란티스이기 때문이다.

애쓰지 마, 노력하지 마, 신경쓰지 마.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인생에 관해 사람들이 흔히 떠들어 대는 조언 -긍정과 행복으로 가득 찬 자기계발 요령- 은 사실 우리에게 '부족한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런 조언은 개개인이 이미 자신의 결점과 실패로 인식하고 있는 부분을 파고들어, 그것에 몰두하게 한다.

 

좋은 삶을 살려면, 더 많이 신경 쓸 게 아니라, 더 적게 신경 써야 한다. 요컨대, 오로지 코앞에 있는 진짜 중요한 문제에만 신경을 쓰라는 말이다.

 

더 긍정적인 경험을 하려는 욕망 자체가 부정적인 경험이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부정적인 경험을 받아들이는 것이 곧 긍정적인 경험이다.

가치 있는 것을 얻으려면, 그에 따르는 부정적 경험을 극복해야 한다. 부정을 피하거나 막거나 억누르거나 입막음하려는 시도는 역풍을 불러올 뿐이다.

신경 끄기의 기술

신경 끄기는 무심함이 아니다. 다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얼마 전, 우리 어머니는 친한 친구한테 큰돈을 뜯겼다. 내가 무심한 사람이었다면, 어깨를 한 번 으쓱한 뒤 모카커피를 홀짝이며 드라마의 다음 시즌을 다운로드했을 것이다. 미안해요. 엄마. 하지만 그 대신 난 분노했다. 머리끝까지 화가 나서 말했다. "안돼요, 그건 아니죠, 엄마. 우리 변호사를 구해서 그 놈한테 쫓아가요. 왜냐고요? 난 신경 안쓰니까요. 놈을 가만 두지 않을 거에요."

'아무것에도 신경 쓰지 않음'이 아니라, '목표에 따르는 역경에 신경 쓰지 않음'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자신이 보기에 옳거나 중요하거나 고귀한 것을 하기 위해서라면, 누군가를 열 받게 하는 것쯤은 신경 쓰지 않음을 의미한다.

인생에서 마주하는 모든 것이 아닌, 중요하지 않은 모든 것을 향해 "꺼져"라고 말한다. 진짜로 중요한 것에 쓰기 위한 신경을 따로 남겨 놓는다.

고난에 신경 쓰지 않으려면, 그보다 중요한 무언가에 신경을 쓰라.

우리 인생에 중요하고 의미 있는 무언가를 찾는 일이야말로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과 에너지를 가장 생산적으로 사용하는 길일 것이다. 진정으로 의미 있는 것을 찾지 않는다면, 무의미하고 하찮은 것에 신경이 쏠릴 테니까 말이다.

알게 모르게, 우리는 항상 신경 쓸 무언가를 선택한다.

기본적으로 우리는 '기꺼이 신경을 쓸 대상'을 좀 더 꼼꼼히 고르게 된다. 이게 바로 성숙이다. 가끔은 성숙해질 필요가 있다. 사람은 진짜로 가치 있는 것에만 신경 쓰는 법을 배울 때 성숙해진다.

 

더는 모든 것에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사는 게 다 고만고만하다는 걸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모두 다 늙어간다는 것, 달에 갈 수 없다는 것, 또는 엠마 스톤을 만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래도 괜찮다. 삶은 계속된다. 점점 줄어만 가는 신경을 우리 삶에서 가장 가치 있는 부분을 위해 남겨 놓는다.

해피엔딩이란 동화에나 나오는거야.

우리 삶의 방향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지만, 대부분 잘 하지 않는 질문들이 있다. '당신은 어떤 고통을 원하는가' 그리고 '무엇을 위해 기꺼이 투쟁할 수 있는가'.

환상적인 섹스와 원만한 관계를 원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그를 위해 골치 아픈 대화, 어색한 침묵, 마음의 상처, 감정을 드러내는 심리극을 감수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래서 멈춘다. 멈춰 서서 고민한다. '이렇게 하면 어떨까?' 묻고 또 묻는다. '다른 사람을 찾아볼까?' 라는 질문이 떠오를 때까지 말이다. 결국 극단의 관계로 이혼 소송에 이르게 될 때쯤, 스멀스멀 올라오는 생각. '내가 왜 이러고 있지?' 생활수준과 삶에 대한 기대치를 20년 전으로 되돌리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대체 왜?

왜냐면 행복에는 투쟁이 따르기 때문이다. 행복은 문제를 먹고 자란다. 기쁨은 땅에서 데이지가 솟아나고 하늘에서 무지개가 피어나듯 저절로 생기는 게 아니다. 인생의 진정한 의미와 성취감은 자신만의 투쟁을 선택해 감내함으로써 얻어야 한다. 당신에게 고통을 주는 것이 불안이나 외로움 또는 강박장애건, 아니면 매일 당신이 깨어있는 시간의 절반을 엉망으로 만드는 상사건 간에, 해법은 그런 부정적 경험을 받아들여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것이다. 피하거나 구원을 바라서는 안된다.

'무엇을 위해 투쟁할 것인가' 라는 문제가 당신이라는 존재를 규정한다.

 

당신이 그 계단을 오르다 어느 지점에서 멈출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유감스럽게도 그건 오산이다. 기쁨은 오르는 일 그 자체에 있기 때문이다. 성공을 결정하는 질문은 '나는 무엇을 즐기고 싶은가'가 아니라, '나는 어떤 고통을 견딜 수 있는가'다. 행복으로 가는 길에는 똥 덩어리와 치욕이 널려 있다.

 

부처가 얻은 깨달음 가운데 하나는 이것이다. 삶 자체가 일종의 고통이다. 부자는 부유해서 고통받고 가난한 자는 가난해서 고통받는다. 가족이 없는 자는 가족이 없어서 고통받는다. 가족이 있는 자는 가족으로 인해 고통받는다. 세속적 쾌락을 좇는 자는 세속적 쾌락 때문에 고통받는다. 금욕하는 자는 금욕 때문에 고통받는다. 모든 고통이 동등하다는 게 아니다. 분명히 어떤 고통은 다른 고통보다 더 아프다. 하지만 인간인 이상 누구도 고통을 피할 수는 없다.

 

살다 보면 문제가 끊이지 않는다. 건강해지기 위해 피트니스클럽 회원권을 끊으면, 곧 새로운 문제가 생긴다. 체육관에 제 시간에 가기 위해 일찍 일어나야 하고, 러닝머신에 올라 30분 동안 마약중독자처럼 땀을 뻘뻘 흘려야 하며, 온 사무실에 땀 냄새를 풍기지 않으려면 샤워도 하고 옷도 갈아입어야 한다. 애인과 많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 수요일 밤을 데이트의 날로 정하면 또 새로운 문제가 생긴다. 수요일마다 오늘은 무엇을 해야 둘 다 만족할지 궁리하고, 근사한 저녁 식사를 위해 돈을 마련해야 하며, 눈을 씻고 찾아봐도 더는 보이지 않는 둘 사이의 열정도 찾아야 하고, 거품이 부글거리는 욕조에서 섹스하자는 계획도 어떻게든 실행에 옮겨야 한다. 문제는 끝없이 계속된다. 단지 바뀌거나 나아질 따름이다. 행복은 문제를 해결하는 데서 나온다. 여기서 핵심은 '해결'이다. 문제를 피하거나 아무런 문제가 없는 척하면 불행해진다. 해결 못 할 문제가 있다고 해도 역시 불행해진다. 처음부터 문제 밖에 자리하는 게 아니라, 문제를 해결하는 거다.

자신이 좋아할 문제, 자신이 즐겨 풀 문제를 찾아야 한다. 오직 그럴 때만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 있다.
어느 것이건 간에 쾌감은 인생의 지표로 삼기에는 얄팍하고 비생산적이다.

 

우리 모두가 문제로 인한 고통을 가라앉힐 나름의 방법을 가지고 있고, 적절히 사용하기만 하면 나쁠 게 전혀 없다. 하지만 문제를 피하고 고통을 가라앉히는 기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마침내 문제를 직면했을 때 받게 될 고통은 더 커질 것이다.

감정은 우리 삶의 방정식의 일부일 뿐, 전부는 아니다. 좋게 느껴지는 것이라고 해서 다 좋은 건 아니고, 나쁘게 느껴지는 것이라고 해서 다 나쁜 것만도 아니기 때문이다. 감정은 단지 길잡이일 뿐이다.

당신이 결혼하는 사람이 당신과 싸울 사람이다. 당신이 구입하는 집이 당신이 수리할 집이다. 당신이 선택하는 꿈의 직업이 당신에게 스트레스를 줄 직업이다. 어떤 일이건 희생이 따르는 법이다. 다시 말해, 우리를 기분 좋게 해주는 것은 한편으로 우리의 기분을 해치기 마련이다. 얻음은 곧 잃음이기도 하다. 긍정적 경험이 부정적 경험을 규정할 것이다.

왜 너만 특별하다고 생각해?

돋보이고 대단한 삶"만"이 가치 있다는 전제를 받아들이는 것은, 자신을 비롯한 대부분의 인간이 가치 없는 쓰레기라는 결론 또한 받아들이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자존감 캠페인의 문제는 사람들이 '자신을 얼마나 긍정적으로 느끼느냐'로 자존감을 측정했다는 데 있다. 개인의 자아 존중감을 제대로 측정하려면 사람들이 자신의 부정적인 면을 어떻게 느끼느냐를 봐야 한다.

 

따라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0과 1의 나열은 수많은 정보 중 0.0001%에 속하는 극히 예외적인 것들뿐인다.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있을 때, 우리의 무의식은 스스로가 어떤 면에서 아주 특별하거나 아주 모자라거나 둘 중 하나라는 판단을 내린다. 또 나는 다른 사람과는 뭔가 다르고, 세상의 규칙에 연연할 필요도 없다고 판단한다. 이런 것이 바로 허세다.

 

고통이 깊어질수록, 우리는 문제에 대항할 힘을 잃고 그에 대한 보상 심리로 허세를 받아들인다. 그리고 대체로 그 양상은 다음의 두 방식 중 하나로 나타난다.

  1. 난 대단한 사람이고, 남들은 다 머저리야. 그러니까 난 특별한 대우를 받을 자격이 있어.
  2. 난 머저리고, 남들은 다 대단한 사람이야. 그러니까 난 특별한 대우를 받을 자격이 있어.

겉보기엔 정반대의 사고방식 같지만, 그 중심에는 똑같이 이기적이고 나약한 속마음이 자리하고 있다.

 

사실 '나 혼자만의 문제'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당신이 경험하는 문제를 수많은 사람이 과거에 겪었고, 지금도 겪고 있고, 미래에도 겪을 것이다. 주변 사람들 또한 그럴 것이다. 당신에게 생긴 문제나 당신이 느끼는 고통을 과소평가하는 게 아니다. 피해자 시늉도 때를 봐가며 하라는 소리가 아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하나다. 당신은 특별하지 않다.

 

충고하건대, 자신이 특별하다거나 남다르다는 생각을 버려라. 삶의 기준을 평범하고 일반적인 것으로 다시 정하라. 자신을 유망주나 재야의 천재로 보지 말라. 비참한 피해자나 형편없는 실패자로도 여기지 말라. 그보다 훨씬 평범한 정체성인 학생, 배우자, 친구, 창작자와 같은 기준으로 자신을 평가하라. 자기의 정체성을 좁고 희귀한 것으로 규정할수록, 더 많은 삶의 요소들이 위협적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므로 되도록 단순하고 일상적인 방식으로 자신을 규정하라.

'고통을 피하는 법'은 없어.

고통이 불가피하다면, 살아가면서 문제를 피할 수 없다면, 우리가 던져야 하는 질문은 '고통을 어떻게 멈출 것인가'가 아니라 '나는 왜 고통받고 있는가', 즉 '무엇 때문에 고통받는가'다.

자기 인식의 방법

  • 자신의 감정을 이해하기
  • 감정을 느끼는 원인을 분석하기
  • 개인의 잠재의식 속의 가치관 파악하기

색다른 조언들 대부분이 단기적으로 사람들의 기분을 좋게 해주는 얄팍한 수법일 뿐, 장기적으로 진짜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사람들의 지각과 느낌은 변하기 마련이지만, 근본적인 가치관과 그 가치관을 평가하는 기준은 변하지 않는다. 얄팍한 조언에 기대는 건 진정으로 성장하는 길이 아니다. 그건 그저 더 큰 쾌락을 얻기 위한 또 다른 길에 지나지 않는다.

쾌락, 물질적 성공, 나는 다 안다는 태도, 무한 근정과 같은 가치는 삶의 이상으로 삼기에 적절치 않다. 한 사람의 삶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은 쾌락, 성공, 지식, 긍정과는 거리가 멀다. 중요한 건 좋은 가치와 기준을 못 박아 정하는 것이다. 그러면 즐거움과 성공은 그 결과로 자연히 따라온다. 즐거움과 성공은 좋은 가치관의 부산물로, 그 자체로는 공허한 쾌락에 지나지 않는다.

건전하고 좋은 가치의 예로는 정직, 혁신, 유연함, 자립, 후원, 자존감, 호기심, 너그러움, 겸손, 창조 등이 있다.

선택을 했으면 책임도 져야지.

쓰라린 기분을 느낄 것인가, 솟구치는 기분을 느낄 것인가. 둘 사이를 가르는 건, '이건 내 선택이니 내 책임이다' 라는 마음가짐이다. 지금 비참함을 느끼고 있다면, 아마도 그건 현재 상황의 일부를 내가 통제할 수 없다고 여기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말해 내 능력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 내 선택과는 무관하게 억지로 떠맡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 문제는 내가 선택한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에너지를 느낀다. 반면 내 의사와 상관없이 문제가 강요되었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부당함과 비참함을 느낀다.

명심하라, 외부 환경이 어떠하건 간에 내 삶에서 일어나는 일은 모두 내 책임이다. 우리한테 일어나는 일을 우리가 전부 통제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 사건을 어떻게 해석하느냐, 그리고 거기에 어떻게 대응하느냐는 언제나 우리 마음에 달려 있다.

삶에 더 큰 책임감을 가질수록, 삶에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우리는 항상 '경험'을 책임지며 살아간다. 그것이 '내 잘못'으로 생긴 일이 아니라 할지라도, 이것은 삶의 일부다.

 

자신의 처지를 다른 사람 탓으로 돌리는 것과 자신의 상황에 실제로 책임을 지는 것은 다르다. 당신의 상황에 책임이 있는 건 다른 누구도 아닌 당신 자신이다. 당신의 불행을 다른 사람 탓으로 돌릴 수도 있겠지만, 불행을 책임질 사람은 오로지 당신뿐이다. 왜냐면 살면서 맞닥뜨리는 사건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대응하고,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를 선택하는 건 언제나 당신이기 때문이다. 경험을 평가할 기준을 선택하는 건 언제나 당신이다.

넌 틀렸어, 물론 나도 틀렸고.

  • 우리는 끊임없이 진리와 완성을 향해 나아가지만 실제로 거기에 도달하지는 못한다.

확신은 성장의 적이다. 사건이 실제로 일어나기 전까지 확실한 건 아무겂도 없다. 실제로 일어난 사건조차도 논쟁의 여지는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선택하는 가치관이 필연적으로 불완전하다는 점을 받아들여야만 성장할 수 있다.

확실성을 추구할 게 아니라, 끊임없이 의심하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자신의 느낌과 믿음을 의심해야 한다. 확신을 추구하는 자세를 버린 뒤, 스스로 미래를 일구지 않는다면 내 앞날이 어떻게 될지 질문해야 한다. 항상 내가 옳기만을 바랄 게 아니라, 내가 어떻게 틀렸는지를 따져 봐야 한다. 우리는 항상 틀리기 때문이다.

긍정적 경험과 부정적 경험에 관한 당신의 판단을 믿지 말라. 우리가 확실히 알 수 있는 건 그 경험이 당시에 고통스러웠는지 아닌지 뿐이다. 그런 건 별 가치가 없다.

 

우리의 모든 "믿음"은 틀렸다. 인간의 마음은 오류로 가득한 난장판이다.

우리의 가치관은 불완전하다. 자신의 가치관이 완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위험천만한 독단적 사고방식에 빠져 허세를 부리고 책임을 회피하기 십상이다.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길은 먼저 여태까지의 행동과 믿음이 잘못되고 비효율적인 것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자신의 잘못을 흔쾌히 받아들여야만 진정한 변화와 성장을 이룰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자아를 찾아라'와 같은 말을 따르는 건 위험하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확신이 스스로를 특정한 역할이나 쓸데없는 기대에 옮아멜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잠재력과 기회를 자기 발로 차버릴 수도 있다. 너 자신을 절대 알지 말라. 그래야 끊임없이 노력해 깨달음을 얻게 되며, 자신의 판단을 과신하지 않고 타인의 생각도 겸허히 받아들일 수 있다.

"내가 질투하고 있다고? 그런가? 왜지?" "내가 화났다고? 그렇다면, 난 자존심을 세우고 있는 것뿐인가?" 이런 질문을 습관화해야 한다. 보통은 단순히 이런 질문을 하는 것만으로도 삶의 여러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겸손과 연민을 배울 수 있다. 하지만 유념해야 할 점이 있다. 내 생각이 틀렸는지 의심해 보는 것과 실제로 내 생각이 틀린 것은 다르다. 가령 당신의 애인이 술만 먹으면 폭력적인 사람이 된다면, 그 상황에서 그가 결혼해도 괜찮을 사람인지에 대해 의심을 품는 건, 옳다. 내 말은 그때그때 질문을 던지고 생각을 해보라는 것이지, 자학을 하라는 게 아니다. 명심하라. 삶에 어떠한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는 건, 분명히 뭔가 잘못된 게 있다는 뜻이다. 당신이 날이면 날마다 거기에 시무룩하게 앉아 있다면, 그건 당신이 이미 뭔가를 놓치고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게 무엇인지 스스로 알아내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실패했다고 괴로워하지 마.

피카소가 노년에도 카페에 앉아 냅킨에 그림을 휘갈기며 재미를 느낄 수 있었던 이유, 그것이 바로 그가 성공한 이유다. 피카소가 중요하게 생각했던 가치는 단순하고 소박하며, 끝이 없는 것이었다. 그 가치는 바로 '꾸밈없는 표현'이었다. 그가 냅킨에 휘갈겨 그린 그림조차 가치 있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사람들은 고통이나 분노, 슬픔을 느끼면, 만사를 제쳐두고 그런 느낌을 마비시키는 데 몰두한다. 이들의 목표는 얼른 '좋은 기분'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물질적인 수단을 동원하거나, 자신을 속이거나, 엉터리 가치관으로 돌아가서라도 말이다. 그러나 정작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자신이 선택한 고통을 견디는 법이다. 새로운 가치관을 선택한다는 건 새로운 고통을 자신의 삶에 들여오는 것이다. 그 고통을 즐기고 음미하라. 두 팔을 활짝 벌려 환영하라. 그리고 고통스러워도 당신이 선택한 가치관에 따라 행동하라.

모든 결과가 과정의 일부라고 생각하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성공의 기준은 그저 행동하는 것이며, 자극은 전제조건이 아니라 보상이다. 우리는 자유롭게 실패하고, 실패는 또다시 성장의 원동력이 된다.

거절은 인생의 기술이야.

아무것도 거부하지 않는다면, 아예 정체성 자체가 형성되지 않는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거부와 대립, 갈등을 피하려는 욕구, 모든 걸 동등하게 여기고 모든 걸 조화롭게 만들려는 욕구는 교묘하고 심각한 형태의 허세다. 응석받이들은 자신의 기분이 항상 좋아야 한다고 믿기 때문에 거절하거나 거절당하는 상황 자체를 무조건 피하고 본다. 본인이나 타인의 기분이 나빠질 수 있으니까. 그리고 거절을 회피하기 때문에 이들은 쾌락과 자아도취에 빠져 가치 없는 삶을 살아간다. 이들이 신경 쓰는 것이라고는 쾌락을 조금이라도 더 유지해서 곧 닥쳐올 실패를 요리조리 피하고 고통스럽지 않은 척하는 것뿐이다.

 

당신의 문제를 다른 사람이 대신 해결해줄 수는 없다. 그런 건 꿈도 꾸지 말라. 그건 당신을 행복하게 만드는 길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당신도 다른 사람의 문제를 대신 해결해줄 수 없다. 이 또한 상대를 행복하게 만드는 길이 아니다. 불건전한 관계의 특징은 두 사람이 자기만족을 얻기 위해 상대의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는 것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건전한 관계의 특징은 두 사람이 상대에게 만족감을 주기 위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피해자와 구원자는 감정적 쾌락을 얻기 위해 서로를 이용한다. 서로에게 중독된 상태라고 해도 될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이들은 감정적으로 건전한 사람을 만나면, 지루함을 느끼고 '화학반응'이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이들이 감정적으로 건전하고 안정적인 사람을 그냥 지나치는 건, 안정적인 상대의 견고한 경계가 '흥분'을 일으키지 않아서 지속적인 쾌락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자기 문제를 스스로 책임지고 상대에게 책임을 묻지 않는 게 진정한 사랑이다.

 

그래, 어린 시절에는 경험의 폭을 넓히는 게 바람직하다. 아마 필수라 해도 좋을 거다. 결국엔 세상을 폭넓게 경험하면서 내 모든 걸 바칠 만큼 가치 있는 게 무엇인지 알아내야 한다. 하지만 황금이 묻혀 있는 곳은 깊다. 뭔가에 끊임없이 몰입해 깊이 파고들어 그걸 캐내야 한다. 관계, 직업, 훌륭한 생활 방식을 만들기를 비롯한 모든 일에서 마찬가지다.

결국 우린 다 죽어.

너 자신보다 대단한 것에 신경 써라. 자신이 거대한 영원의 일부임을, 자신의 삶이 이해할 수 없는 위대한 생성의 일부를 이루는 과정일 뿐임을 받아들여라. 사람들이 교회에 가는 건 이런 느낌 때문이다. 전쟁에 나가 싸우는 것도 이 때문이다. 가정을 꾸리고, 연금을 적립하고, 다리를 건설하고, 휴대전화를 발명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내가 나보다 더 위대한 알 수 없는 무언가의 일부라는 찰나의 느낌 때문이다.